[21] 광주는 왜 전국에서 맨 처음 안중근 의사 기념비 세웠을까.
[21] 광주는 왜 전국에서 맨 처음 안중근 의사 기념비 세웠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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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년 광주에 세워진 전국 최초의 안중근 숭모비.
24년만에 다시 찾아 중외공원에 재건립한 안중근 숭모비.
광주광역시 북구 운암동 중외공원. 그 곳 광주시립미술관 앞 자그마한 동산에 검은 비석이 서 있다.'大韓義士安公重根崇慕碑'(대한의사안공중근숭모비)'-.
안중근 의사를 기리는 기념비다. 높이는 2.7m, 가로 세로 각 0.9m, 무게 5톤 규모다. 기단이 낮아 그렇지 한 눈에 보아도 육중하고 기품이 풍긴다.
아는 이 극히 드물지만, 이 숭모비가 바로 대한민국에서 맨 처음 세운 안중근 의저소득가구 전세자금대출
사 기념비이다. 1959년에 서울 남산에 안 의사 동상을 건립하고 이어 1961년 12월 광주에 이 숭모비를 세웠다.
안 의사 숭모비는 처음부터 중외공원에 있지는 않았다. 중외공원이 1981년에 개장된 터라 숭모비가 여기에 있을 리 만무하다. 중외공원의 원래 이름은 어린이대공원으로, 그해 8월 20일 5·18로 흉흉한 민심을 달래려는 전두서민대출
환 신군부가 의도적으로 만든 공원이었다.
광주 한 유지의 땅을 기부 받고, 시설물은 국민 성금 56억원으로 설치했다. 원조 중외공원은 지금의 광주체육중·고교 앞 저수지 일대였는데, 무지개다리가 세워져 어린이대공원과 연결되면서 자연스럽게 중외공원으로 통칭됐다.
#일제 신사 부순 옛터 인근에 세워
성균관대학마이너스통장 연장
초대 총장을 지낸 독립운동가 김창숙 선생은 1960년 안중근의사기념사업회 회장에 선출된 후 첫 프로젝트로 안 의사 기념비 건립을 추진했다. 기념사업회는 1961년 12월 3일 무등산이 내다보이는 광주공원에 전국 제1호 안중근 의사 숭모비를 세웠다.
위치는 광주공원 시민회관에서 현충탑으로 올라가는 계단 입구 오른쪽이었다. 김창숙 선생이 직서브프라임모기지전망
접 비문을 쓰고, 진도 출신 소전 손재형 선생이 전서체로 '大韓義士安公重根崇慕碑'(대한의사안공중근숭모비)'라 깊이 새겼다.
왜 전국 최초의 안 의사 숭모비가 광주에 세워졌을까. 그 답은 숭모비 비문에 있다.
"나는'이 천하의 의사로서는 안중근보다 더 높은 이가 없고, 남방의 명승지로서는 무등산보다 더 으뜸가는 곳이 없다'mp3제공
는 말을 들었다. ……이제 이 비석을 세우는 일은 전남 유림으로부터 시작되어 전국이 호응해서 이루어진 것이고, 그 비석에 기록을 실은 자는 늙은 앉은뱅이 김창숙이다."
비문에서 보듯 안 의사 숭모비 건립 주체는 전남지역의 유림이었다. 광주 전남 지역민들은 이 비석의 위치 또한 광주공원으로 이미 정한 듯 하다. 일제 강점기 광주공원 정상에는국가장학금
일본 메이지(明治)천황의 신사가 있었다. 신사 옆에는 일제 병사를 기리는 충혼비가 있었다. 일제 잔재가 남아 있는 그 곳에 안중근 의사 숭모비를 세워 해방된 나라의 독립 정신을 영원히 계승 기억하고자 했다.
광주시민회관 기공식 사진으로 확인된 안중근 숭모비 (사진 오른편합자회사
검은색 비석)
#광주시민회관 건립에 위쪽으로 이전
안중근 숭모비는 광주 시민회관이 건립되면서 1971년 4월, 충혼탑 오른편인 성거사지 5층 석탑 주변으로 옮겨진다. 해방 후 일제가 일본 군인들을 추모하기 위해 만든 충혼비가 있던 자리였다.
광주 시민회관 착공식신용회복지원위원회
사진을 보면 충혼탑으로 올라가는 계단 옆에 숭모비가 서 있고, 숭모비 주변에 어린이 탑도 보인다. 이 사진이 발견되기 전에는 대부분 안중근 숭모비가 성거사사 주변에 처음 세워진 것으로 알았다.
성거사지 쪽으로 옮겨진 숭모비는 한동안 자리를 지켰다. 그러다가 5·18 이후 중외공원(어린이대공원)이 생기면서 1987년 옮겨졌다.( 광주시 홈직장인 4대보험
페이지 기록)
중외공원에 서 있던 안중근의사 숭모비는 1995년 운명이 또한번 바뀐다. 광복 50주년을 맞아 숭모비 자리에 새로운 안중근 동상을 세웠다.곡성 출신인 안학선 씨를 위원장으로 안중근 의사 동상건립추진위가 구성됐고, 조각가인 전남대학교 미술대학 김대길 교수가 동상 제작을 맡았다.조각상의 글자 '안중근 의사상'은 서예가인 장전 하근저당
남호 선생이 썼다.
그런데 동상 건립과정에 문제가 생겼다. 건립 비용이 부족하여 동상의 기단을 만들 수가 없었다고 한다. 동상 추진위는 안중근의사 숭모비의 기단과 좌대를 그대로 사용하기로 결정했다. 좌대 위에 서 있던 '대한의사안공중근숭모비'가 내려지고 대신에 그 자리에 권총을 든 안의사 동상이 올라갔다. 기단에서 내려진 숭모비는 동상 뒤 나지막한 언덕에 세워 두었다. 헌데, 어느날 감쪽같이 이 숭모비가 사라지고 말았다.
노성태 남도역사연구원장은 "오래전부터 안중근 의사 숭모비의 소재를 찾았지만, 알 수가 없었고, 광주시 또한 숭모비 행방에 대해 전혀 몰랐다"면서 "그토록 귀중한 안중근 의사 제1호 기념비가 20여년 넘게 사라졌지만, 아무도 찾지를 않았다"고 말했다.
1909년 안중근 동지들이 단지한 러시아 크라스키노(연추) 에 세워진 안중근 단지동맹비. 이건상 기자
#안중근의 생애와 위대성은 무엇
호남사람들은 왜 안중근 의사를 그토록 추앙했을까. 단순하게 조선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데만 국한하지 않는다. 안 의사는 1879년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난다. 그는 처음부터 의열투쟁론자가 아니었다. 1907년까지만 해도 진남포에 '삼흥학교', '돈의학교'를 운영하고 직접 교장으로 활동하던 애국계몽운동가였다. 국채보상운동에도 적극적으로 뛰었다.
1908년 그는 아버지 친구의 조언을 듣고 중국 만주 땅 명동촌·용정·훈춘을 거쳐 러시아 연해주 연추(현 추카노보)에 들어갔다. 그곳에서 최재형·이범윤이 결성한 무장의병조직 '동의회'의 우영장이 돼 국내진공투쟁을 벌였다. 1909년 2월(음력)에는 11명의 동지와 함께 약지를 잘라 항일투쟁을 결의했다. 단지동맹이라 불리는 '단지동의회'다. 이어 그해 10월 26일 오전 9시 30분 하얼빈에서 명성황후 시해한 죄 등 15가지 항목의 죄를 물어 이토 히로부미를 격살했다.
안중근은 애국계몽운동-의병무장투쟁-의열투쟁 등 당시 상황에서 부여받은 독립운동의 방략들을 모두 실천한 인물이다. 나아가 이토 격살 후에는 진정한 동양의 평화를 꿈꾸며 '동양평화론'을 저술, 극동 아시아의 대 비전을 제시했다.
#사라진 숭모비 뜻밖에 나주서 찾아
안중근 하얼빈 의거 110주년을 맞은 2019년 안중근 숭모비를 찾는 작은 움직임이 있었다. 광주지역 역사교사와 언론이 중심이 돼 수소문에 나섰다. 하지만 한 달이 지나도록 소식이 없었다. 근데, 기적이 일어났다.
뜻밖에 광주가 아닌 나주에서숭모비가 발견됐다. 나주에 거주하던 이 모(당시 47세)씨가 3년 전 주택용 조경석을 구하기 위한 금천면 한 석재상을 찾았다가 검은 비석을 보았다. 비석에는 한문으로 안중근이란 이름도 있었다. 예사롭지 않게 생각했지만 발길을 돌렸다.
3년 세월이 지났다. 그는 식사를 위해 나주 한 식당을 찾았다가 탁자에 놓인 신문을 우연히 보았다. '사라진 안중근 의사 숭모비를 찾는다'는 기사였다. 이 씨는 바로 3년 전 보았던 금천면 석재상으로 달려갔다. 천운일까. 비석은 팔리지 않고 그
나주 한 석재상에서 발견된 당시 숭모비.
대로 있었다. 군데 군데 흙이 묻어 있는 비석에는 분명하게 '大韓義士 安公重根 崇慕碑'라고 써 있었다.
안의사 숭모비가 발견되자 광주시는 '안중근의사 숭모비 재건립추진위원회'를 구성했다.2019년 10월 25일 숭모비가 마지막 위치했던 중외공원 안중근 동상 곁에 재건립했다. 중외공원에서 사라진지 24년만이다.
전국 제1호 안중근 의사 기념비….광주에는 안중근이 있다.
글·사진/이건상 기자 [email protected]
위치 : 광주광역시 북구 하서로 50 (중외공원)